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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머물겠지요, 그대가 붙잡는다면

별님이 | 06.02 | 조회 33 | 좋아요 0


천둥소리 희미하게 울리고 구름이 끼어,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그대를 붙잡아 둘 텐데.

—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머물겠지요, 그대가 붙잡는다면.


A faint roll of thunder, clouded skies —

if only the rain would come, I might keep you here.

— Even if no rain falls, I will stay, if you ask me to.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 2013)」 — 감독 신카이 마코토. 위 구절은 작중 핵심 모티프인 만요슈(萬葉集) 권11에 실린 작자 미상(詠み人知らず)의 상문가(相聞歌) 한 쌍(2513·2514번)으로, 앞 두 줄은 유키노 유카리(성우 하나자와 카나)가 읊는 노래이고, 마지막 줄은 아키즈키 타카오(성우 이리노 미유)가 돌려주는 답가다. 입력으로 주어진 "비가 와도 나는 너를 기다릴게"는 작중 그대로 등장하는 대사가 아니라, 비를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기다림·머무름' 정서를 압축한 통속적 의역에 가깝다.


「상황」 비가 오는 날에만 신주쿠 교엔 정원의 정자에서 마주치던 열다섯 살 고교생 타카오와 스물일곱 살 여성 유키노는, 서로의 이름도 처지도 모른 채 비라는 우연에 기대어 만남을 이어간다. 유키노가 먼저 읊는 만요슈의 노래는 "비라도 내려 그대를 붙잡아 두고 싶다"는 마음이고, 타카오의 답가는 "비가 오지 않아도,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머물겠다"는 응답이다.


「의미」 사랑은 비라는 핑계가 만들어 주는 만남이 아니라, 핑계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스스로 남기를 택하는 의지임을 이 두 노래는 말한다. 기다림은 날씨나 우연에 떠밀리는 수동이 아니라, 상대가 청한다면 그 자리에 서 있겠다는 능동적 약속이다. 옛 노래의 언어를 빌려 두 사람은 차마 직접 꺼내지 못한 마음을 서로에게 건넨다.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2013년 발표한 약 46분 길이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빗속 도쿄 신주쿠 교엔을 무대로 한 청춘 멜로다. 주인공 아키즈키 타카오는 이리노 미유가, 유키노 유카리는 하나자와 카나가 목소리를 맡았다. 두 사람은 비 오는 날 정자에서 거듭 마주치며 가까워지는데, 첫 만남에서 유키노는 타카오에게 만요슈의 노래 한 수를 수수께끼처럼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 노래의 정체와 답가를 타카오가 뒤늦게 알아내는 장면이 영화의 정서적 매듭이 된다. 위 구절이 가장 또렷이 울리는 곳은 장마가 끝나 더는 비 오는 정원에서 만날 수 없게 된 뒤, 아파트 계단에서 감정이 터지고 다시 화해하는 후반부로, 비라는 매개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가 오지 않아도 머물겠다"는 답가의 의미가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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