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독이라.
벗은 그 무서운 독 그 밖에 모른다.
나는 그 독을 품고 선선히 가노라.
마음에 독을 차고 선선히 가노라.
나의 얼굴을 아는 자 나를 만나거든
내 가슴에 독을 찬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그냥 지내쳐 가거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벌판에서
서러운 귀신 만나면 우리 서로 만났다 하고
기뻐하며 가거나, 슬퍼하며 가거나.
이 독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나니.
시인 —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김소월(金素月)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1934년 요절한 한국 근대시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으로, 오산학교에서 스승 김억(金億)의 지도 아래 시작(詩作)에 눈을 떴다.
「진달래꽃」·「산유화」 등 민요적 리듬과 한(恨)의 정서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펴내며 한국 근대 서정시의 정수를 남겼다. 그의 시는 구어적 어조와 전통적 율격을 결합해 독자적인 음악성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 소개
「독(毒)을 차고」는 1923년 발표된 시로, 소월의 시 가운데 이례적으로 강인하고 결연한 어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독'은 상처이자 자존(自尊)의 표지로, 세계의 몰이해와 소외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고집스럽게 간직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전체 3연의 단정한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선선히 가노라'라는 구절은 체념이 아닌 담담한 긍지로 읽힌다. 문둥이가 거니는 벌판과 '서러운 귀신'이라는 극단적 이미지는 소월의 다른 시들과는 또 다른 실존적 깊이를 보여 주며, 한국 근대시사에서 개인의 내면 고독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