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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별님이 | 05.26 | 조회 6 | 좋아요 0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인 — 정지용 (鄭芝溶, 1902~1950)

정지용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시인으로, 감각적이고 정밀한 이미지즘 시풍을 확립했다.

그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기틀을 다졌고, 이상·박목월 등 후배 시인들을 발굴한 편집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오랫동안 남한에서 작품이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해금 이후 그의 문학적 위상이 온전히 복원되었다.


시 소개

「향수」는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고향의 풍경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감각적 이미지로 촘촘히 엮어낸 시다. 다섯 연의 마지막마다 반복되는 후렴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노래와 시의 경계를 허물며 절절한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 낸다.

황소의 울음, 짚베개를 고이는 아버지, 이삭을 줍는 아내, 서리 까마귀가 지나는 초라한 지붕 등 구체적이고 향토적인 세부 묘사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 잃어버린 세계 전체를 소환한다. 이 시는 한국 근대시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로, 이미지즘의 정밀함과 민요적 가락이 드물게 조화를 이룬 성취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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