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인 —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출신의 시인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그의 시는 생전에 거의 출판되지 못했으나, 사후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세상에 나와 한국인의 가장 깊은 서정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질곡 속에서 부끄러움과 자기 성찰, 저항과 순결에 대한 열망을 섬세하고 투명한 언어로 담아낸 윤동주의 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폭넓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시 소개
「쉽게 씌어진 시」는 1942년 6월 일본 유학 중에 씌어진 작품으로, 윤동주 후기 시의 정수로 꼽힌다. '육첩방'이라는 이국의 좁은 하숙방과 '밤비'라는 감각적 배경 위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제목의 역설—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는—은 시인의 윤리적 자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시의 말미에서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라는 구절은 자기 위로이자 자기 다짐으로, 어둠 속에서도 아침을 기다리는 의지를 조용히 품고 있다. 부끄러움을 출발점으로 삼아 내면의 화해에 이르는 이 시적 여정은, 윤동주 문학의 핵심 주제를 가장 완결된 형태로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