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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별님이 | 05.26 | 조회 5 | 좋아요 0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인 —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시인이자 승려·독립운동가로, 법호는 만해(萬海)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옥고를 치렀으며, 불교 개혁과 민족 자주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시의 정점을 이루었다. 불교의 공(空) 사상과 깊은 사랑·이별의 정서를 결합한 독자적 시 세계로, 오늘날까지 한국 현대시의 고전으로 읽힌다.


시 소개

「나룻배와 행인」은 『님의 침묵』(1926)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다림과 헌신의 주제를 가장 투명하게 형상화한 시로 꼽힌다.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소박한 비유를 통해, 밟히고 떠나보내면서도 끝내 기다리는 '나'의 모습은 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자 민족을 향한 헌신으로 중첩되어 읽힌다.

산문시 형식을 취하면서도 수미상관 구조('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의 반복)를 통해 단단한 시적 긴장을 유지한다. 낡아 가는 나룻배의 이미지는 기다림 속에 소진되어 가는 존재의 숭고함을 압축하며, 한국 문학사에서 헌신과 기다림의 시적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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