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뒤 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인 —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 법호는 만해(萬海)다. 1905년 출가하여 불교 혁신 운동에 앞장섰으며, 1919년 3·1 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하며 한국 근대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 불교 철학과 민족적 저항 의식을 서정적 언어로 녹여낸 그의 시는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그 너머의 합일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한다.
시 소개
「님의 침묵」은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 시로, 근대 한국 서정시의 대표적 정전이다. '님'은 연인이자 조국, 나아가 불교적 절대자를 동시에 가리키는 중층적 상징으로, 이별의 슬픔을 다시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키는 역설의 구조가 이 시의 핵심이다.
산문시 형식을 취하면서도 만남과 이별, 침묵과 노래가 팽팽하게 맞서는 긴장감이 내내 유지된다. 마지막 행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는 부재 속에서도 사랑이 지속된다는 역설적 긍정으로 시 전체를 수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