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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윤동주

너구리 | 05.26 | 조회 5 | 좋아요 0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인 —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촌 출신의 시인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그의 삶은 짧았으나,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내면적 고뇌와 순결한 저항 의식을 섬세한 서정으로 담아낸 시편들은 한국 근현대시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사후에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출간되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시 소개

「자화상」은 1939년 9월에 쓰인 것으로 전해지며, 윤동주의 자기 성찰적 세계관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우물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거울 삼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화자는 '미움'과 '그리움'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식민지 현실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끝내 그 존재를 놓지 못하는 복잡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산문시에 가까운 유려한 문장 속에서도 달·구름·바람·가을이라는 자연 이미지가 반복·변주되며 시적 리듬을 형성한다.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 그리고 화해를 향한 갈망이 중첩된 이 시는 한국 근대 서정시에서 내면 독백의 미학을 가장 섬세하게 구현한 작품 중 하나로 문학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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